프라이드 FC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1

[해외mma뉴스/UFC 스포]

1. 실현되지 않았던 PRIDE 라이트웨이트급 그랑프리 2007


PRIDE 34 대회가 끝난 뒤, 5월 20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PRIDE 라이트웨이트급 그랑프리 2007이 개최된다고 발표되었다. 허나 이 발표는 5일 뒤인 4월 14일, PRIDE FC Worldwide 로부터 연기된다.



원래 2007년도에 있을 PRIDE 라이트웨이트급 그랑프리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5월 20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1라운드가 있을 예정이었고, 준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2라운드는 7월 16일 나고야에 위치한 레인보우 회관에서,. 그리고 결승은 9월 30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실제로 5월 20일 대회 같은 경우는 PRIDE 팬클럽 멤버들과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공식 모바일 사이트로부터 티켓이 판매되기도 했었는데, 2007년 PRIDE 라이트웨이트급 그랑프리에 참가할 선수들은 챔피언인 고미 타카노리를 비롯, 사쿠라이 하야토, 카와지리 타츠야, 이시다 미츠히로, 길버트 멜렌데즈, 요아킴 한센, 루이즈 아제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오 그리고 아오키 신야가 참전할 예정이었고, 이후 4월 13일 DEEP 흥행에서 파브리시오 몬테이로를 꺾은 키타오카 사토루가 참전할 예정이었다.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UFC의 웰터급을 대표하는 조지 생피에르와 맷 휴즈를 비롯, 당시 UFC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션 셔크 역시 후보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퍼티타 형제들로부터 인수되기 전에 이러한 계획은 구상되어왔고, 나중에 인수후에도 퍼티타 형제들은 이러한 계획에 OK 의사를 보였지만 실제로 이를 성사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PRIDE가 퍼티타 형제로부터 인수되었다고 발표된 것은 3월 27일이었고, PRIDE 34 대회는 4월 8일날 열렸다. 고로 새로운 PRIDE를 알리는 그랑프리를 5월 20일에 개최하기엔 여러보로 시간이 역부족이었다. 이외에도 인사 이동 등 퍼티타 형제들이 먼저 해결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다.



결국 이 계획은 당시엔 무산되었고, PRIDE에선 영원히 실현되지 않았으나, 1년 뒤 원조 PRIDE 스태프들과 FEG로 부터 DREAM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어떻게 보면, DREAM의 시초는 실현되지 않은 PRIDE의 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드림 1의 라이트급 토너먼트는 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 드림 1 대진표 링크 - http://en.wikipedia.org/wiki/Dream_1






2. 아오키 신야의 고백



아오키 신야가 이 책에서 가진 인터뷰에 의하면, 슈토 미들급 챔피언 등극 이후 경찰 학교에 있던 와중 UFC로부터의 제의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는 바로 BJ 펜이 될 예정이었다고. 아오키 신야는 세금을 떼고 본인에게 제의가 온 액수를 계산때려보니 이 액수를 받고 1년에 4번 정도 싸우게 되면 먹고 살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제로 아오키 역시 UFC의 제의를 받아들일 예정이었지만, 하세가와(아오키 매니저)를 만나 UFC 제의와 관련해서 토론을 하니 하세가와는 여러 위험성이 있었던 아오키의 UFC 행을 말렸으며, 실제로 아오키는 만약 하세가와가 없었으면 자신은 PRIDE에 참전도 못했을 것이며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아오키 신야는 9승 2패를 기록하고 있던 유망주였다. 정말 아오키 신야의 말대로 UFC로부터 BJ 펜과의 대결을 제의받았고, 아오키 신야가 이를 받아들여 BJ 펜을 상대하게 됬을 경우엔... 상상은 여러분들께 맡기도록 하겠다.



3. 원래 PRIDE 1에서 사쿠라바 vs. 헨조 그레이시를 성사시키려고 했던 PRIDE.



다카다 노부히코 vs. 힉슨 그레이시의 메인 이벤트외에 PRIDE측은 다른 언더 카드를 꾸며야 했는데, 그 중 하나로 거론 된 것이 바로 1997년 10월 11일에 있었던 PRIDE 1 대회 이후 3년 뒤에 성사되었던 사쿠라바 카즈시 vs. 헨조 그레이시였다.


힉슨 그레이시가 PRIDE측의 제의를 받아들였을때, 다른 그레이시 가문의 선수들인 헨조 그레이시나 호일러 그레이시 모두 PRIDE 1에 참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이게 성사될 경우, 'xx vs. 그레이시 가문' 이라는 테마로 흥행을 추진시킬 수 있었는데, 저 'xx' 는 훗날 일본 프로 레슬러로 대체되어 '프로 레슬러 vs. 그레이시 가문' 의 테마로 흥행을 추진시키려고 했었다.


PRIDE측은 대회에 참전시킬 프로 레슬러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로 UWF 인터내셔널과 킹덤 측의 선수들이었다. 킹덤 프로 레슬링은 1997년에 창단되어 1998년에 망해버린 단체인데, 이 단체는 프로 레슬링 단체이긴 했지만 오픈 핑거 글로브를 사용하여 얼굴에 펀치를 허용하는 등 UWF 인터내셔널보다 좀 더 현대 MMA 적인 성격을 가진 프로 레슬링 단체였다. 당시 킹덤에서 활동하고 있던 핵심 선수들인 안조 요지, 카네하라 히로미츠, 사쿠라바 카즈시 같은 선수들이 거론되었으며, 실제로 KRS의 사카키바라와 킹덤의 회장인 스즈키 켄지측과 미팅이 있었다.


사카키바라는 스즈키 켄지에게 선수들의 출연을 허락해줄 수 있냐고 요청하였으나 스즈키 켄지는 이를 거절하였고, 자세한 미팅의 내막은 오늘날 까지도 가려진채 결국 PRIDE측이 원했던 선수들의 참전은 모두 무산되었다. (그나마 나중에 키타오 코지는 참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PRIDE가 계획했던 또 다른 경기로는 바로 탱크 애봇 vs. 키모의 경기였는데, 탱크 애봇이 일본에 입국을 할 수 없었기에 댄 새번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댄 새번은 키모와의 경기를 가졌지만 경기는 매우 절망적이었고, 경기를 보고 있던 관중들은 야유를 퍼붓기 바뻤다. 실제로 당시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PRIDE의 스태프 멤버들은 벌레를 씹는 듯한 얼굴로 경기를 시청했다고 한다.



2000년도에 콜로세움이라는 흥행을 통해서 후나키 마사카츠가 힉슨 그레이시를 상대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그러나 콘도 유키는 사울로 히베이로에게 KO 승리를 거두면서 후나키에게만 쏠려있던 관중들의 반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만약 PRIDE 1에서 사쿠라바가 헨조 그레이시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아마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쿠라바 카즈시는 PRIDE 1에 불참하였고, 2달 뒤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있었던 UFC Japan 대회에 참전. 그리고 Ultimate Japan Tournament 에서 우승을 하면서 일본 프로레스 팬들에게 기억될 명대사를 남긴다.



 "프로 레슬링은 강합니다!"







4. PRIDE가 PRIDE 1 대회에 참전시키길 바랬던 프로 레슬러들.



이 외에도 KRS 측은 PRIDE 1 대회에서 당시 일본의 프로 레슬링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수들을 섭외하려고 했다. 마에다 아키라, 후나키 마사카츠, 타무라 키요시, 스즈키 미노루 같은 U쪽 선수들은 물론이며, 심지어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활약하고 있던 하시미토 신야와 쵸슈 리키 그리고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에이스였던 미사와 미츠하루 역시 후보 대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계획을 구상했던 사람들은 프로 레슬링계는 물론이며 MMA 쪽에도 커넥션이 없었다는 것이었고, 만약 이런 계획을 가지고 회사를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근데 너님은 누구?" 라는 냉담한 반응이 올 것은 뻔했다. 또한 다카다 노부히코 vs. 힉슨 그레이시가 메인 이벤트를 차지하는 이상, 이 선수들은 언더 카드에서 경기를 뛰게 될 것인데, 다른 선수들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예로 故 미사와 미츠하루 같은 경우는 이미 이 시기에 프로레스계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하였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전일본 프로 레슬링의 삼관 헤비급 챔피언으로 맹활약하며 당시 최다 방어를 했던 사람이었다. (총 8회, 그러나 이 기록은 약 6년 뒤 카와다 토시아키로부터 갱신된다.) 故 하시모토 신야 역시 막 IWGP 헤비급 타이틀을 사사키 켄스케에게 내주었던 상황.)



과거에도 PRIDE가 보였던 이런 계획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이전에 1994년도에 UWF 인터내셔널이 토너먼트를 개최했을때 미사와 미츠하루와 텐류 겐이치로, 하시모토 신야, 마에다 아키라 그리고 후나키 마사카츠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이는 거절되었다.


일찍이 故 하시모토 신야 같은 경우는 1993년 K-1 그랑프리를 앞두고 디렉터인 이시이 카즈요시로부터 후나키 마사카츠와 함께 초대받았지만, 후나키 마사카츠는 이후 판크라스로 가버렸고, 하시모토 신야는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의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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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엠xxx [2014.01.06 00:53 신고]  [Reply adress]  [Modify/Delete]  [Reply]

    올커니

  2. STARLESS [2014.01.06 02:45 신고]  [Reply adress]  [Modify/Delete]  [Reply]

    아오키 신야가 말하는 "이 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해당 글이 다 아오키 신야가 말하는 "이 책"을 번역하신 건가요?

    • GOTMMA [2014.01.06 03: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링크가 안걸리는데.. 일본아마존에서 pride 30이라고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책일겁니다.

      . 저희가 요약한건 일어판은 아닌걸로 알구여.

  3. 오빤국뽕스타일 [2014.01.06 08:00 신고]  [Reply adress]  [Modify/Delete]  [Reply]

    아오키신야 복날에 개쳐맞듯 맞는거 보고싶다...쪽빠리 새끼 관절기 걸어놓고 안풀어줌

  4. 소금맛 [2014.01.06 13:45 신고]  [Reply adress]  [Modify/Delete]  [Reply]

    상상할 필요도 없었겠구만여. 상상 안하는게 나을거 같음. 아무리 아오키라도 사망한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

  5. 점촌좋아 [2014.01.06 13:52 신고]  [Reply adress]  [Modify/Delete]  [Reply]

    Pride - Secret Files 의 내용인 것 같군요 받아놓고 읽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계속 수고 좀 부탁드립니다 ㅎ
    추천 눌렀어요 ^^